
12월이 막 시작되던 날, 쿠사나기 네네는 고백을 받았다. 상대는 같은 반 남학생. 네네를 꽤 오래 좋아했단다. 그 남학생은 연애라곤 생전 어디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새빨간 얼굴로 편지를 내밀었다. 네네에게 그 아이는 그냥 클래스메이트. 였다. 정말 관심이 없어서 지나가다가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할 정도로. 아무래도 이 고백… 받아줄 이유가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쿠사나기 네네까지 연애의 연, 아니 ㅇ도 모를 숙맥이라는 것이다. 숙맥 둘이 모이면… 답이 없다…. 어쨌든 네네는 처음으로 그런 의문을 가졌다. 좋아한다는 건 대체 뭘까. 네네는 당황을 담은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줄게, 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서둘러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카미시로 루이는 전부 들어 버렸다.
제 3의 ?
카미시로 루이×쿠사나기 네네
카미시로 루이와 쿠사나기 네네는 소꿉친구이다. 10년 전에 서로를 처음 만나, 남들보다 더욱 애틋하게 서로를 생각해 온. 둘의 세상에는 오직 둘밖에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 애틋했다. 혼자일 뻔했던 둘은 서로의 세계에 서로가 있었기에 혼자가 아닐 수 있었고, 그 세계는 조금 작더라도 그때의 둘에게는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 세계는 두 사람의 첫 번째 세계. 그 세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루이와 네네의 꿈은 무궁무진했다. 두 사람은 정말 좋아하는 쇼로 그 세계를 꽉 채워 나갔다. 비록 그 세계가 반으로 갈라져 서로가 만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카미시로 루이는, 10년도 더 된, 이제는 조금 색이 바랜 첫 번째 세계를 계속해서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네네는 제게 쇼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으며, 자신을 소중한 동료들과 만날 수 있게 해 준 계기이자 그 동료이기도 하다. 루이에게 있어 네네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다. 이 모든 것에는, 당연히 사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미시로 루이는 쿠사나기 네네를 사랑한다. 우정도 사랑의 일부라 한다면 10년 전부터,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담기 힘들어질 정도의 설렘만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아마 그건 네네와 재회한 이후부터. 그리고 자신이 네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아무래도 비교적 최근. 중학생 시절을 오롯이 홀로 보낸 루이는 고독에 익숙했다. 그래서 당연히, 앞으로의 나날들도 쭉 고독뿐이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깨트리고 루이를 뒤흔든 건 고독 이후 다시 만난 네네였다. 쿠사나기 네네라는 계기는 루이를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자 루이가 나아가도록 해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루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네뿐이었다.
유치하지만 카미시로 루이는 답지 않게 질투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네네의 어릴 적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고, 네네가 자몽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뿐이고, 자몽을 먹을 때 사르르 얼굴에 드러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아는 것도 나뿐이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던 것도 나고, 방 벽을 타고 들려오는 네네의 캐롤을 듣는 것도 나다. 그러다가도 루이는 어김없이 심경이 복잡해졌다. 루이는 네네가 많은 사람과 만나는 것이 기뻤다. 네네가 원더랜즈×쇼타임에 들어와 츠카사나 에무와 친구가 된 일이나, Leo/need 멤버들과 친구가 된 일도 정말 기뻤다. 초등학생 시절 작고 작았던 루이와 네네의 첫 번째 세계의 한계를 깨고, 네네는 새로운 두 번째 세계를 열었다. 루이는 첫 번째 세계를 굉장히 소중히 생각했고, 자신은 첫 번째 세계를 여전히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만, 네네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네네를 나아가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 그 세계를 열어 준다면? 네네가 사랑을? 아마 네네를 '그런' 의미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루이는 기뻤을 것이다. 슬픈 건 우정으로서의 사랑마저 그 색이 붉게 변해 루이를 잡아먹은 지 오래라는 것. 네네에게 찾아왔을지도 모르는(혹은 찾아오지 않길 바랐던?) 첫사랑이 네네를 행복하게 해 준다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게 해 준다면…. 루이는 포기해야 했다. 적어도 루이는 그렇게 여겼다. 루이는 네네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발 물러섰다. 루이는 자신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을 때마다 저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어쨌든 네네에겐… 좋은 거니까.
쿠사나기 네네도 그녀 나름대로의 고민이 많았다. 애초에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 수조차 없고, 그 애에게는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애인지도 모를 뿐더러, 그래도 써 온 성의는 있어서 편지를 읽어 보았는데도 내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하지만 내 안에 조금이라도 그 아이에 대한 호감이 있으면 어떡하지? 류의 생각이 네네를 괜히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사람에게 있어 처음 받는 고백은 당연지사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설레게 한다. 사랑을 받는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니까.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깨닫기에는 사랑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작은 설렘이 연애 감정인지 아닌지부터 헷갈렸다. 그래서 네네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대체 뭔지부터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그걸 찾아야 이 작은 설렘에 대한 정의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루이는 네네를 피하기 시작했다. 네네가 혹시, 정말 그 아이를 좋아하는 거라면 루이는 응원해야 했다. 분명히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도저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루이는 여전히 네네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서 우정만 남기고 지우려고 해도 사랑이란 글씨는 진해져만 갔다. 그저 불편한 감정이 루이를 가득 채워갔다. 그 불편한 감정은 네네를 마주치기만 하면 더 커져서 혹시 자신이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수라도 해 버릴까 루이는 걱정에 잠겨 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네네에게 말이라도 잘못 하는 순간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다. 루이가 다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럴 여지조차 없도록 네네를 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네네에 대한 애틋함은 작아질래야 작아질 수가 없어서 가방 속엔 항상 우산이 두 개 들어있었고, 매일 아침 네네가 목도리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며 여분의 목도리를 챙길까 말까 고민하는 루이였다.
그리고 그걸 네네가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었다. 네네는 좋아한다는 게 뭔지 찾아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루이마저 자신을 피하니 최근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네네는 루이를 평소처럼 대하려 노력했다. 루이가 자신을 피하기 때문에 전부 수포가 되었지만. 쇼의 연습이 끝나고 나서도 정리할 게 있다면서 먼저 돌아가라고 한다든가, 전화를 걸어도 착신음만 끊임없이 들려온다든가. 용기내어 루이의 반에 찾아가도 카미시로는 지금 여기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아무것도 알 리 없는 네네는 루이가 원망스러웠다. 하다못해 자신의 감정을 루이와 함께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네네의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선 루이는 지금 네네의 감정을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네네는 조금은 그리 믿고 있었다. 루이와 계속해서 정답을 찾다 보면 결국에는 찾게 되어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이든. 그러니까 이번에도,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게 해 주었던 루이는 없다. 허전했다. 루이라는 존재는 언젠가부터 네네의 일상 일부분이 되어, 네네는 루이가 없으면 마음 한 켠이 텅 빈 기분이 들게 되었다.
네네는 더는 루이에게 왜 자신을 피하냐 물을 수 없었다. 노력은 꺾였고 냈던 용기는 져 버렸다. 그야 루이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 수 있었는데, 이건 도저히 알 수가 없으니까. 자신이 알 수 없는 범위라면, 그걸 알게 되는 건 조금 두려웠다. 이상했다. 루이가 혼자였을 때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이후, 어떤 상황에서라도 루이를 구해내겠다고 다짐한 네네였다. 하지만 그 다짐과는 달리 네네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음은 이미 이 상황 속에 갇힌 루이를 백 번이고 구하고도 남았겠지만, 더 이상 행동은 그런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슬슬 12월 중순이다. 원더랜즈×쇼타임의 크리스마스 쇼도 어느 정도 모양새가 잡혀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연출가의 영 아닌 듯한 상태. 그에 더불어 네네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 츠카사와 에무는 아무래도 둘이 싸운 건가 싶다. 물론 쇼에 문제는 없었다. 루이와 네네는 어느 방향이든지 최선을 다했다. 연습도, 그리고 연습 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도. 하지만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격히 스위치가 내려가듯, 루이와 네네에게는 다시 어색함이 맴돌았다. 츠카사는 좌장으로서 뭐라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루이와 네네가 함께 지내 온 시간 속의 결속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함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츠카사가 해 줄 수 있는 건 약간의 상담뿐. 그마저도 루이 녀석은 말을 꺼내면 뭔가 터질 것 같아서…. 로봇을 만드는 사람이어서 그런가 요즘 하는 행동이 약간 로봇 같아졌으니까…. 에무와 함께 네네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한다.
"루이, 오늘은 노래와 관련해서 네네와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바쁘다면 먼저 돌아가라. 뒷정리는 우리가 마저 하고 갈 테니."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갈게. 츠카사 군과 에무 군, 내일 보자.
…그리고 네네도."
루이를 보내고 나서야 츠카사와 에무의 상담 아닌 상담은 시작되었다. 네네, 루이가 요즘 좀 상태가 이상한데, 그러니까, 너와 조금 서먹하다고나 할까…. 왜 그런 건가…? 응, 응. 네네 쨩이랑 루이 군, 요즘 이상해~! …그러게, 그걸 나도 모르겠어. 엥? 사이가 어색한 건 루이와 네네 두 사람인데 정작 네네는 이유도 모르고 있다. 네네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루이가 네네를 피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정도가 심해져 시선을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반에 찾아가도 보이지 않고, 쇼의 연습이 끝나도 집에 따로 가려고 한단다. 츠카사는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지만 웬걸, 망설이는 네네였다. 네네는 이런 걸 상당히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물어볼 수 없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냥, 물어보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답답한 기분이 든다고. 츠카사와 에무는 네네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한참 맞댔지만, 그럴듯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오게 된 한 줄의 조언은 물어볼 사람은 네네밖에 없으니 조금만 더 힘내 봐라! 정도. 네네는 한참 동안 고민한 결과가 이거라니 조금은 허무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한 줄의 조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간 루이는 고민이 많았다. 그게 정말로 노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루이도 안다. 쭉 붙어 다니던 소꿉친구 한 쌍이 그렇게나 서먹해졌는데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네네가 화가 나 있는 것도 당연히 안다. 매일같이 고민이 있을 때의 얼굴을 하면서도 연습을 시작하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네네를 스테이지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루이의 마음도 그리 편치 못했다. 지금 당장 네네를 피하는 것은, 루이 딴에서 언젠가의 네네를 위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네네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면 오히려 자신을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네네를 볼 자신이 없으니 도망쳐 버린 게 아닐까, 라고.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는 건 결국 상황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두렵다는 것이다. 모두가 도와주려 하지만 나아갈 수 없다. 루이는 그 두려움을 타파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서로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한 번 멀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이상 다가가는 것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것만 같았다. 그 이상으로 다가갔다가 마음이 맞지 않아 다시 멀어지는 건, 루이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모순적인 일이다. 루이는 네네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음에도 네네를 피하고 있다.
잔뜩 꼬여 있는 루이의 마음은 차라리 자신이 네네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네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날부터, 그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에게 연심을 갖는 것부터 괜히 불순함이 가득한 것만 같았다. 네네를 향한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순수한 마음에서의 위함인가. 그럼에도 루이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사랑을 억눌러가며 끊임없이 네네를 위했다. 그러다가 억누른 사랑이 터져 나오려고 용을 쓰기 시작한 건 네네가 고백을 받은 그 날부터였다. 자신을 누르면 아무렇지 않게 네네를 응원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누르는 게 힘들어지고, 사랑이 너무 커져 버티기 힘들어진 지금의 루이는 무력했다. 네네를 응원하는 데에 자신의 사심이 담겨 있어 방해가 된다면, 루이는 그 길로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루이는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머릿속이 네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한편 집에 돌아간 네네도 고민이 많았다. 루이는 어릴 때부터 묻질 않으면 대답해 주질 않았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떠드는 주제에…. 걱정시키는 게 싫어서겠지. 쓸데없는 다정이었다. 이런 다정은 필요 없는데. 그래서 물어야 했다. 용기를 내야 했다. 오늘 모두와 얘기하며 얻은 한 줄의 조언이 조금은 허무했던 이유는 결국 해답이 그것밖에 없어서, 라는 것을 네네도 알고 있었다. 루이를 다시 못 본 척하는 건 자신에게도, 루이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이대로 멈춰 있는 것은 루이를 다시 혼자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이는 정말로 아무에게도, 고민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런 루이에게 깊은 곳까지 물어볼 수 있는 건 10년이 만들어 준 거리감 제로 센티미터, 지금은 소수점이 조금 찍혀있을 듯하지만…. 그런 거리감을 가진 네네뿐이었다.
네네는 역으로 질문했다. 내게 루이는 어떤 사람인가? 소꿉친구?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람? 보름 정도를 괜히 마음고생하게 만든 사람? …그리고, 소중한 사람. 네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루이에 대한 어떤 마음이 있는지, 네네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루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은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와서 아무리 깊은 곳에 있어도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루이의 다정의 산물이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건 다정밖에 없던 시절부터 조금씩 쌓아 온. 자신이 하는 무언가는 여태껏 루이에게 받은 무언가의 반도 되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네는 그 날 밤을 루이의 다정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보냈다. 하나의 다정을 생각하면 연쇄적으로 또 다른 다정이 쏟아져 나와서.
수천 개의 다정을 세던 그 시간은 새벽 4시. 네네는 루이에게 물어야 했다. 루이가 자신의 깊은 마음 속 수심을 재어 자신의 마음을 찾아주길 원했다. 그야 네네의 마음의 깊이를 잴 수 있는 건 소중한 사람, 루이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루이의 마음의 깊이을 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네네 자신이라고 믿었으니까.
내가 네 깊이를 재어 네 마음을 알고 나면, 나는 너에게 깊은 마음을 다 내 주며 내 마음을 찾아 달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부터 틀어진 우리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있을 거라고.
네네는, 결정했다.
12월 24일, 드디어 내일이 크리스마스 쇼이다. 그리고, 네네가 마음먹은 날이기도 하다. 네네는 츠카사와 에무에게 선전포고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리허설이 끝나고 루이에게 꼭 물어보고 올 거라고. 응원도 받고 왔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네네는 마음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이며 장치 점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루이가 장치 점검을 끝내고 조용히 자리를 뜨려는 그 때, 네네는 루이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같이 돌아가자. 사뭇 진지해 보이는 네네의 표정에 루이는 순간 긴장했다.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피하고 싶었지만, 루이도 며칠이고 생각했다. 피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자신의 마음 속 모순은 언제가 되어서야 사라져 나갈 것인가. 그런 생각의 조각들이 오늘 네네의 '같이 돌아가자.' 라는 말로 인해 결정체가 되었다. 루이는 여전히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루이의 마음 속 모순은 끊임없이 자신과 네네를 괴롭힐 것이고, 어쩌면 최선의 행동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력한 루이는 그 날 새벽에 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오늘 답을 냈다. 며칠의 네네에 대한 생각의 결론은 네네로 인해 나왔다. 루이는 네네에게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금세 밤하늘을 마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의지할 것은 서로와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 이른 캐롤을 튼 가게들도 많았다. 그렇게나 시끌벅적한 거리를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아무리 소꿉친구래도 며칠 간의 서먹함은 몇 분으로는 메울 수가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쌓아 온 다정은 건재해서 그 와중에도 루이의 시선은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빨갛게 얼은 네네의 손에 가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를 먼저 깨트린 건,
"루이."
"……응?"
"…그러니까, 이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는데…. 그, 요즘,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루이가 그런 걸 먼저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고민을 말하기 싫어서 날 피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말해 줘. 우린… 그런 것도 터놓을 수 있는 사이잖아."
네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네가 다시 낼 수 있는 용기의 최대치였다.
그런 것도 터놓을 수 있는 사이. 루이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건지. 그 말에 엮여 있는 건 신뢰였다. 네네는 루이를 믿고 있다. 그건 물론 루이도 마찬가지. 서로를 향한 신뢰는 세월 속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두터워졌고,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신뢰는 무뎌지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두터워질 것이다. 우린 절대로 다시 멀어지지 않는다. 멀어지지 않음을 이제서야 깨달은 루이가 손을 꽉 쥐었다.
"……맞아, 네네를 피했어. 네네가, 고백을 받았단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 아이를, 네네가 좋아한다면…. 그런 상황에 내가 있는 건 민폐니까. 그 아이에게도, 네네에게도. 하지만 네네는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고 피하기만 한 내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네네."
네네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일로 한 달 가까이 저를 피해 온 루이가 정말 바보 같아서. 루이의 지나친 생각과 무거운 다정 속 복잡한 심경이 네네를 괴롭게 했다. 왜 네네는 묻지 못했을까, 네네는 두려웠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그게 더 이상 루이의 다정을 받을 수 없다는 증거일까 봐. 루이의 다정으로 이루어졌던 네가 소중하다는 마음은, 네네로 하여금 서로가 끊임없이 다정을 주고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런 바람이 좌절되는 것을 루이에게 직접 확인받는 건 잔인했다. 하지만 루이의 행동은, 네네와 두려움과는 정반대로 다정 과잉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네네가 그 아이의 고백을 거절한 지는 꽤 됐다. 자신에게 있어 그건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란 것쯤은 네네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오답인 건 알지만 정답도 모른다니, 네네는 스스로도 꽤 웃기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좋아한단 건 뭘까. 난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한 달동안 찾았는데,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어. 루이는 그 답을 알아?
"난 그저, 네네가 행복하길 바라. 네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해. 그러니까… 네네의 마음을 듣고 행동했어야 했어. 하지만, 내가 네네를 마주하기 두려워서 피해 버린 거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네네를, 소꿉친구로서 온전히 응원할 수 있을까, 하고. 역시, 전부 내가 이기적인 탓이야."
루이에게 물을 때의 네네는, 혹시나, 라는 걱정조차 사라진 후였다. 두 사람의 10년과 그간 루이에게 받아온 모든 것과 루이를 믿었다. 내가 아는 루이는 절대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그저 루이의 다정이 자신에게 전해지지 못 한 것뿐이라고. 그렇기에 이기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네네는 그간 받아 온 다정에 전해지지 못 한 다정, 그리고 오늘 받은 다정까지 더해 꼭꼭 씹어 삼켰다. 루이가 그간 네네를 향해 해 왔던 다정이 담긴 말은 친구보다 훨씬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네를 향한 루이의 감정은 무엇인가. 또 친구보다 훨씬 많은 것이 담긴 말을 받은 네네의 마음에는 대체 몇 미터 아래에 루이에 대한 감정이 숨어있는 것인가. 네네는 서로의 감정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네네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역시, 전처럼 지내는 게 좋아.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쇼의 연습이 끝나면 같이 돌아가고…. 그런 평범한 일상을 같이 보내고 싶어. 그러니까……"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자신도 모르게 뱉어낸 열 글자짜리 짧은 말은 순식간에 가늠할 수 없었던 감정의 이정표를 정방향으로 바로잡아 주었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고백 같아졌잖아!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네네의 특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걸 잘하는 건 루이 쪽이겠지. 그럼에도 드물게 네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네네가 정말로 루이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기에. 네네와 루이가 서먹하게 지내 온 한 달이 알려준 건 네네에게 루이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정표의 정방향은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깨달았다. 네네는 그제야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설렘은 정의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너에게 하고 있는 것, 네가 나에게 하고 있는 것.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고, 설렘이고, 사랑이었어. 왜 그 애를 향한 내 감정이 좋아하는 게 아니란 걸 확신했을까. 내가 이렇게나 좋아해 마지않는 사람이 이미 있는데, 마음 속에 누가 들어올 겨를이 없지. 네 다정으로 인해 내 마음은 이미 포화 상태인걸. 너무 익숙해져 알아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다정이 네네로 하여금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도록 만들었고, 그 말이 감정의 이정표를 움직였다. 정방향이 뜻하는 건 서로를 향한 마음. 좋아한다는 것. 그러니, 네네의 말은 고백이 맞을지도 모른다.
서로 함께하는 것이 두려웠다면, 두려운 이유를 없애면 된다. 네네는 루이의 다정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고 루이는 타인을 사랑하는 네네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사랑했기에 생겨난 그 두려움은, 사랑했기에 없앨 수 있었다. 말 한 마디에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루이,
좋아해.
사람마다 가진 것이 모두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사랑의 모양 역시 모두 다르다. 루이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애정을 오직 너의 행복만을 바라며 죄책감 없이 주는 것이고, 네네의 사랑은 나에게 애정을 다 줘 버려서 비어 있는 너를, 받은 애정으로 끊임없이 채워내 다시금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뜻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설렘 속 사랑은 이제서야 형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낸 용기는 다른 모양의 사랑임에도 퍼즐마냥 딱 들어맞도록 두 사람을 이끌었다.
쿠사나기 네네, 카미시로 루이가 계속해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써 왔던 이름. 카미시로 루이, 쿠사나기 네네도 모르는 사이 마음 속에 새겨진 이름. 그 이름들은 더 이상 지워지지 않을 자국으로 남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는 하얀 눈이 내렸다. 쇼가 끝나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있겠네. 케이크라도 사서, 내 방에서 작은 파티를 하지 않을래? 흩날리는 눈송이와 떨어지는 별을 보면서.
두 사람의 세 번째 세계는 오늘 새로이 열렸다.
세 번째 세계에서의 크리스마스 쇼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ep.
텐마 츠카사는 눈을 찌르고 싶었다. 급매 안 본 눈 삽니다!!!!!!!!!!!!! 를 마음 속으로 외쳤다. 네네로보가 마음 속 목소리의 데시벨도 재 줄 수 있다면 아마 이건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 정도로 측정될 것이다. 그 이유인 즉슨 크리스마스 쇼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쇼의 정리를 하기 위해 백스테이지로 들어갔다가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운…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너희들 정리한다며. 능구렁이 백 마리 잡아먹은 듯한 가오리 웃음의 카미시로 루이는 어디 가고 당황해서 굳어 있는 거대한 남고생만 있었다. 쿠사나기 네네는 또 어떻고. 평소 같으면 여긴 우리가 정리한다며 까칠하게 말할 법도 한데 얼굴이 새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녀석들이 당황하지만 않았어도 단순히 정리하다가 무슨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라도 생각나서 장난치는 거겠지…. 싶었겠지만 그야말로 저건 도둑고양이가 제 발 저린 격. 세 사람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고작 이 녀석들 연애 사업 때문에 내가 그렇게 고민했던 건가? 밖에서 에무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츠카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다. 츠카사는 좌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살면서 딱 한 순간 후회스러울 것이다. 바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