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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사귀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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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탬프?"

  네네는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에무가 방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제 손에 쥔 작은 스탬프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조그마한 크기의 스탬프, 초록색 플라스틱 원통 위에 페니 군의 피규어가 달려있다. 피닉스 원더랜드의 기념품 샵에서 판매하는 걸 본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연습의 집합 시간에 맞춰서 원더 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에무가 후다닥 제게 달려와 손에 쥐여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왜? 네네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듯 다시 에무에게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게 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한대!"

  "이벤트라면…"

  "놀이공원을 찾아온 어린이들이 우리 피닉스 원더랜드의 직원에게 올해에 한 착한 일을 얘기하면, 칭찬을 듣고 팜플렛에 스탬프를 받는 이벤트야. 스탬프를 다 모아서 행사 부스로 들고 가면 선물도 받아 갈 수 있대!"

  "헤에… 놀이동산의 안내원이나 인형 탈만이 아니라, 쇼 캐스트인 우리도?"

  "응! 언제 어린이들이 말을 걸어올지 모르니까. 우리가 스탬프를 안 들고 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구-?"

 

  실망하게 하는 건 안 돼! 에무가 거듭 말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네네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알겠으니까, 표정 풀어. 그 말에 에무가 금세 싱글벙글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누구보다도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다는 게 전해져왔다. 하긴, 에무는 이런 이벤트 좋아하니까. 잘할 것 같고… 스탬프를 찍어준다는 단순한 이벤트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온 장소에서 착한 일을 자랑하고 선물까지 받는다면, 기념할 만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으리라. 자신도 쇼 캐스트인 만큼, 다른 이들을 웃게 만드는 게 좋았다. 그 대상이 놀이공원을 찾아온 어린이들이라면 싫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있지 네네 쨩, 나한테 말 걸어주는 아이들도 많을까? 나 엄청 칭찬해줄 수 있어~."

  "에무라면 많지 않을까? 말을 걸기 쉬워 보이고…."   

  "그랬으면 좋겠네! 헤헤, 나 아이들한테 잔뜩 칭찬해주고, 팜플렛에 스탬프도 마않이 찍어주고, 꼬옥 안아도 줄래! 아, 네네 쨩은 무슨 색 스탬프야? 나는 분홍색―"

 

  신나서 재잘거리는 에무의 말에 네네도 차분히, 그리고 간간이 웃으며 답했다. 처음에는 저 요란한 텐션에 당황하며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네네가 내심 고민하는 부분은 다른 쪽에 있었다. 이벤트의 핵심은 칭찬인데, 자신은 그런 일에 영 자신이 없었다. 에무라면 칭찬을 하며 즐거운 리액션을 하고, 누구라도 기운이 나게 해줄 것 같은데……

 

  "나도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걱정이라면,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떻겠니?"

 

  네네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뒤를 돌아봤다. 상대는 언제 왔는지 제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오랜 소꿉친구,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웃음을 입가에 띄운 루이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하려는 듯 천천히 흔드는 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스탬프가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서, 에무에게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탬프를 받은 모양이다.

 

  "연습?"

  "쇼의 리허설을 하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연습해보는 거야. 한번 해보면 분명 실전에서도 도움이 될 거란다."

 

  리허설? 루이의 말도 꽤 일리가 있었다. 어떤 일이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건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이벤트의 연습이라면, 루이가 어린이 역이라도 해주겠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어딘가 쑥스럽고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비록 그러한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됐어. 연습은 무슨…."

  "여언습―??"

  단호히 거절하려는 찰나, 에무가 우렁찬 목소리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척이나 대단하고 즐거운 일을 들은 것 마냥 눈이 반짝였다.

 

  "역시 루이 군. 엄청 좋은 생각 같아! 둘이 같이 하는 거야? 나도 츠카사 군한테 같이 하자고 할래!"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최고조로 들뜬 에무는, 활짝 웃으며 말하다가 저만치서 오는 츠카사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갔다. 마음속 기대감을 폭탄처럼 끌어안고 후다닥 뛰어갔으니, 곧이어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츠카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그 소리에 네네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 페이스는… 고개를 들어 루이의 얼굴을 보니, 역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봐, 좋은 생각이라고 하잖니? 그가 하려는 말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듯했다. 뭐, 에무는 그 제안이 마음에 든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네네는 루이와 연습을 하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그런 걸 하는 건 창피하잖아!

 

  루이와 연애―… 라는 걸, 시작한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냐면, 서로 손을 잡는 정도는 스스럼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 이제 말을 더듬지 않고도 루이를 제 남자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다.

 

  친구들로부터 루이와는 잘 지내고 있냐는 물음을 듣는 것이나, 츠카사와 에무가 가끔 자신과 루이 둘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자리를 피해 주는 일. 그리고 루이와 등하교를 함께 하게 된 것, 주말에도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 이전보다 자주 문자를 주고받거나 밤에 전화 통화를 하며 잠드는 것… 모두 낯설고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친구로 지낸 기간이 길었던 만큼 연인으로 지내는 건 어색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일도 무색하게, 여느 때처럼 루이가 익숙하게 자신을 이끌어줬다. 새로 나온 협동형 게임을 같이 하자 거나,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니 같이 보러 가자거나,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우니까 집 앞에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며 가지 않겠냐고 하거나…. 가로등 아래서 마주 본 눈이 상냥했고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그러한 일 하나하나가, 싫기보다는 좋은 쪽에 가까웠다. 루이가 먼저 제안해주는 일들이 반갑게 여겨졌다. 손을 잡고 이끌어준다면 자신도 힘들이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오늘 즐거웠어? 그런 질문에는 주저 없이 즐거웠다고 답할 수 있다. 루이의 좋아한다는 말에도, '나도', 정도의 말로 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 입으로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다거나, 상대의 좋은 점을 말하는 건…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그랬다. 솔직하게 상대를 칭찬하는 일은 서툴렀다. 평소에도 퉁명스러운 투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버릇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상대가 연인이라고 해도, 아니, 연인이기에 더더욱 쑥스럽게 느껴졌다. 특히 이런 분위기, 자기를 칭찬해달라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더욱!

 

  "난 안 할 거야."

  "네네,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눈은 전혀 다른 기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험한 연출을 생각할 때처럼 반짝이는 눈. 연습은 핑계고, 이 기회를 틈타서 칭찬을 듣고 싶은 거 아니야? 물론 루이가 나쁜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루이의 눈빛에서 뻔히 보이는 속내가 이제는 쑥스러운 걸 넘어서서 제법 얄밉다. 절대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지. 네네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며, 한참 동안 못 미덥다는 듯 루이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툭 한마디를 내던졌다.

 

  "야채."

  "응?"

  "야채는 먹었어? 착한 어린이는 편식 같은 거 안 하는데."

 

  한 치 의심 없이 웃음 짓던 루이가 단박에 당혹스러운 눈을 해왔다. 이거다, 네네는 봐주는 것 없이 몰아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네네, 야채를 먹으라고 해도, 나로선 위협적인 맛 외에는 느낄 수 없다니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연출에 몰두하다 보면 순식간에 아침이 되어버려서 말이야. 게다가, 좋은 연출이 생각난다면 늦은 시간이라도 아이디어를 정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사고는 안 치고?"

  "…그것도 좋은 연출을 구상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단다. 그리고 최근에 한 실험은 선생님께도 들키지 않았고……."

  즐겁고 화목한 칭찬 이벤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돌연 찾아온 반성회에 루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했다. 그 모습이 좀 안쓰러웠으나,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네네는 단호하게 결정타를 날렸다.

 

  "됐어. 착한 어린이가 아니면 칭찬은 해줄 수 없어. 이제 연습 끝?"

  "네네, 실전에서 그렇게 말했다간 어린이들을 울릴지도 몰라. 실제로 난 지금 마음에 아주 큰 상처를…."

  "아아, 나쁜 어린이랑은 얘기 안 할 거니까―. 연습이나 준비해야겠다."

  "잠깐, 네네―"

  네네는 자신을 부르는 루이를 뒤로하고 유유히 소품실을 향해 걸어갔다. 상처를 받았다며 억울해하는 루이의 표정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려 웃음을 쿡쿡 삼켜야 했다. 진심으로 루이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칭찬해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연습을 시작하자 두 사람은 쇼를 하는 것에 한껏 집중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벤트 연습 소동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듯해보였다.

 

.

 

  "언니, 언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훌쩍 다가왔다. 축제에 걸맞게 화려한 전구와 장식물로 아름답게 장식된 피닉스 원더랜드, 캐롤 풍으로 편곡되어 흘러나오는 테마송, 그리고 예상했듯이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 네네는 그 사이를 뚫고 원더 스테이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 자신을 앳된 목소리가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제 허리 높이만큼 큰 어린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땋은 양갈래, 화려한 원피스, 여타 어린이만큼 이날을 기다려왔음이 짐작되었다. 두 손에 꼭 쥔 팜플렛을 보자 아이가 자신을 불러세운 목적도 알 수 있었다. 에무가 말한 크리스마스 이벤트구나. 내가 입고 있는 쇼 의상을 보고 캐스트인 걸 알았나 봐. 이벤트에 대해서는 확실히 설명을 들었고, 내심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막상 이러한 순간이 다가오니 긴장되었다. 아니야, 잘해야지. 네네는 몸을 숙여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스탬프, 찍어줄까?"

  "…네."

  "…그럼, 올해 한 착한 일을 말해볼래?"

 

  준비한 대로 떨지 않고 잘 말했다. 상냥하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별안간 아이가 고개를 푹 떨궜다. 자신이 멀뚱히 아이를 바라보는 사이, 아이는 작게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에, 설마 우는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굳은 머리는 상황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에 아이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나 선물 받고 싶은데, 착한 일이 없어서…. 오늘도, 일찍 일어나서 놀이공원에 가기로 엄마랑 약속했는데, 내가 아침에 못 일어나는 바람에 엄마가 화를 내서…."

 

  네네는 애써 아이가 천천히 뱉는 말을 머릿속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정리했다. 그러니까, 선물을 받고 싶어서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착한 일로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했던 거구나. 정리가 되자 자신도 함께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도, 아이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려고 놀이공원에 오는 약속을 했을 텐데… 그렇지만, 어떻게 아이를 도와줘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우선 허둥지둥 아이를 달랬다.

 

  "소, 속상하겠다."

  "나도 일찍 자려고 했는데, 책을 읽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엄마랑 약속한 걸 지켜야 했는데, 내가 나빠서 엄마가 화를 낸 거야…."

 

  애써 건넨 말에도 아이가 표정을 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어쩌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싶은 거니까, 그냥 스탬프를 찍어줄까? 하지만, 그렇게 상황을 얼버무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울지 않았으면, 웃었으면 했다. 꿈에 바라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품에 안고 놀이동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스스로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 아니야. 책을 읽는 게 즐거워서 그랬던 거잖아?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정말?"

 

  아이가 슬쩍 고개를 들어 네네를 바라봤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네네도 천천히 눈을 한번 깜박였다. 아이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한 것 같아 속으로 안도했다. 그렇지만 저를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차마 긴장까지 놓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디서 들어본 얘기를 전하는 것처럼 말이 나왔다.

 

  "응. 그러니까… 책을 읽다 보니 너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이 되어있었던 거지? 그건 나쁘기보단… 늦게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게 있는 거니까 대단한 거야."

 

  네네의 말을 듣고 아이가 무언갈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물었다.

 

  "나,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공부를 안 하고 책만 읽어서 혼나는 데도요?"

  "책을 좋아하는구나."

  "네! 엄청 두꺼운 소설책도 읽은 적 있어요. 팜플렛에 도장을 다 찍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념품 샵에 있는 동화책도 받고 싶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책은 수업 시간에도 계속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펼치게 돼요…."

  "수업 시간에 책을 읽는 것 정도야… 학교 수영장에서 폭발을 일으키거나 옥상에서 꽃잎을 날리는 것도 아니잖아? 아, 그래도 선생님한텐 들키지 않게 하는 게 좋을 지도…."

  수영장의 폭발, 꽃잎 얘기가 웃겼는지 아이가 헤헤 소리내 웃었다. 그 모습에 이제는 네네도 한결 긴장이 풀렸다. 동시에, 자신이 하는 말에서 느껴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지난 번에 그가 연습을 청했을 때는 그를 칭찬해주지 않았는데… 뒷걸음질 쳐 쥐잡듯이 도움이 된 격이라 괜스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아이가 기분이 풀린 듯 살며시 웃다가, 돌연 무언가 또 떠오른 듯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어오며 되물었다.

 

  "그런데, 피망도 싫어해서 매일 남기는 데도요?"

 

  이번엔 네네 쪽에서 소리내 웃을 뻔했다. 이 잘못에 대한 변명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이 아이도 그와 닮았다. 그날의 연습 아닌 연습이 없었더라도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네는 자신 있게 아이에게 말했다.

 

  "응. 먹기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아는 사람은 피망만이 아니라 당근이나 오이도 안 먹는데, 키도 엄청나게 크고, 체력도 좋아. 그러니까… 피망 안 먹어도 건강하게, 튼튼하게만 크면 돼."

 

  그 말에 아이가 드디어 활짝 웃었다. 그러곤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팜플렛을 당당히 내밀었다. 네네는 팜플렛을 받아들고 펼쳐 빈칸에 스탬프를 찍었다. 귀여운 초록색 페니 군 도장이 동그란 칸에 딱 맞게 담겼다. 제 마음 한편까지 꽉 찬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지금처럼 계속 웃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팜플렛을 돌려주며 말했다.

 

  "있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네가 무언갈 즐겁게 하는 게 더 중요한 걸… 너희 엄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분명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아이가 팜플렛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네네도 작게 인사했다.

 

  "엄마는 어디에 있어?"

  "으음,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올 동안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아, 저기 엄마! 어? 동화책을 들고 있어요!"

 

  멀리서 걸어오는 상대를 발견하곤 반가워하던 아이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엄마를 부르며 상대에게로 재빨리 달려갔다. 아이의 엄마도 아이를 발견하곤 웃음 지었다. 네네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도란도란 걸어가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아침에 싸웠다고 들었는데. 아이의 엄마가 웃는 모습이나, 기념품 샵에서 사 온 것 같은 동화책을 들고 있던 것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무사히 화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인데, 되려 자신이 무언가를 받은 것처럼 뿌듯했다. 그런 마음을 느끼기도 잠시… 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네―."

 

  네네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니라 다를까, 루이였다. 입가에 한가득 히죽히죽 띤 미소에서 어딘가 불길함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있었어?"

  "음, 책이 즐거워서 그랬던 거라는 부분부터?"

 

  그럼 거의 처음부터잖아! 네네는 얼빠진 채 가만히 루이를 바라봤다. 그럼 그걸 다 들었단 말이야? 중간부터는 루이를 생각하면서 말했는데, 알았을까? 그건 재어 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기분 나쁜 웃음에 이미 답이 있었다. 뭐라 할 말을 못 찾지 못하고 눈만 껌벅이는 사이 루이가 신난 투로 말했다.

 

  "네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는데. 나도 야채를 안 먹어도 튼튼하게만 크면 된다고 생각한단다. 네네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쁘네―."

  "알겠으니까 그만해…."

 

  돌려 말하는 투가 분명 자신을 놀리는 거다. 그가 말을 끝내곤 즐거운 듯 후후 웃었다. 정말 얄미운데 네네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루이가 아까의 대화를 다 들었다면, 그날 하지 못한 칭찬을 양껏 해준 일이나 다름없었다.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네의 말대로라면, 나도 칭찬받아 마땅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든가……."

  네네가 루이의 눈을 피하곤 겨우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별안간 루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네, 그렇게 생각해서 끝날 얘기가 아니잖니. 네네가 나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게도 보상을 줬으면 좋겠네."

  "하지만 루이는 팜플렛도 없잖아."

  "꼭 스탬프가 아니라도 괜찮단다."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네네의 눈을 보란듯이 마주하며. 여기. 루이가 말하곤 검지손가락을 들어 그의 왼쪽 볼을 톡톡 쳤다. 아무리 네네라도 그 의미를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아악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진짜 뭐라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 줄도 모르는지, 그가 뻔뻔히 제 눈을 바라본다. 진심인 건가? 어이없어, 그렇게 해줄 줄 알고? 네네는 스탬프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냅다 그의 왼쪽 볼에 스탬프를 찍었다. 볼살을 누르는 느낌이 플라스틱 손잡이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손을 떼자 허공에서 그의 얼빠진 눈과 시선이 맞았다.

 

  "네네, 이건…."

  "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먼저 갈 테니까! 따라오지 마!"

  네네는 다급하게 소리쳐 그의 물음을 끊었다. 그의 볼에 반쯤 돌아간 채 찍힌 페니군 도장은 외면하고, 몸을 홱 돌려 원더 스테이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가 칭찬이야, 바보. 착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들으라는 듯 대놓고 투덜거리는 건 덤으로. 루이는 정말 착한 아이라도 된 마냥, 네네를 뒤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제 손을 들어 볼을 슬 만져보았다. 만져본다 해서 잉크가 묻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스탬프가 닿던 촉감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제안에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고는, 이내 화를 내고 투덜거리던 네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무심코 쿡쿡 웃었다. 제 얼굴도 네네만큼 붉어졌을까? 제 볼에 올린 손에 화끈거리는 열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선, 그럴지도 모르겠다. 흥겹게 흘러나오는 캐롤이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정말, 사랑을 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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